159:0.1예수와 열 두 사도들이 마가단 공원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거의 백 명 정도 되는 전도자들과 제자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여자 대원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데카폴리스의 여러 도시들에서 가르치며 전파하는 전도 여행을 즉시 시작하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159:0.28월 18일, 목요일인 이 날 아침에, 주(主)는 따르는 무리들을 모두 불러서 사도들마다 열 두 전도자들 중 하나씩과 짝을 짓고, 나머지 전도자들도 열 두 집단으로 나뉘어서 데카폴리스의 도시들과 마을들에 나가 사명활동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여자 대원들과 다른 제자들은 예수와 남아 있도록 지시하였다. 예수는 이 여행에 4 주를 보내기로 하였으며, 9월 16일 금요일까지 마가단으로 모두 돌아오도록 지시하였다. 예수는 이 기간 동안에 종종 그들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달이 지나는 동안, 열 두 집단은 게라사, 가말라, 히포, 자폰, 가다라, 아빌라, 에드레이, 필라델피아, 헤스본, 디움, 스키토폴리스, 그리고 다른 많은 도시들에서 수고를 하였다. 이 여행 동안에는 병을 고치는 기적이나 다른 비상한 사건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159:1.1예수는 어느 날 저녁 히포에서, 한 제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용서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셨다. 주(主)께서 말씀했다:
159:1.2“만일 어느 인정 많은 사람이 일백 마리의 양을 소유하고 있고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다면, 그가 아흔 아홉 마리를 남겨 두고 길을 잃은 한 마리를 즉시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그리고 만일 그가 선한 목자라면, 그가 발견할 때까지 그 잃은 양을 계속 탐색하지 않겠느냐? 마침내 목자가 잃은 양을 찾으면, 그 양을 어깨에 둘러메고 기쁨으로 집에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들을 청하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으니 나와 함께 기뻐합시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아흔 아홉 명의 의로운 사람보다 회개하는 한 죄인을 더 기뻐한다는 것을 내가 선언한다. 그와 같이 이 작은 자들 중에 하나라도 길을 잃도록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아니며, 하물며 그들이 멸망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너희 종교에서 하느님께서 회개하는 죄인들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왕국복음에서 아버지는 죄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기도 전에 먼저 그들을 찾아 나선다.
159:1.3“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니, 너희들도 마땅히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 죄를 용서하시니, 너희들도 마땅히 서로 용서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만일 너희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지으면, 그에게 가서 재치와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결함을 지적해 주어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너와 그 형제 둘이서만 하도록 하라. 만일 그 형제가 네 말을 들으면, 네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 형제가 네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방법대로 계속 실수를 행하면, 네가 다시 가되, 모두에게 친구인 둘 혹은 세 사람을 데리고 함께 가서 네 증언을 확인하는 증인으로 하고 그리고 너에게 죄를 저지르고 있는 형제를 네가 자비롭고도 공정하게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라. 만일 그가 형제들의 말도 거절하면, 회중(會衆)에게 그 모든 사실을 알려도 무방하고, 만일 그가 모든 형제들의 말도 거절하면, 그들이 현명한 생각에 따라 조치를 취하도록 하라; 자기 멋대로 행하는 그런 사람은 왕국 밖으로 쫓아내도록 하라. 그리고 한편, 너희가 마치 네 동료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기라도 한 것처럼 행하거나, 죄를 용서하든지 아니면 기타 방법으로 마치 하늘 무리 감독자들의 특권을 빼앗는 듯한 행동은 결코 용납되지 않으나, 그러나 이 세상 왕국 안에서의 현세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일은 너희에게 맡겨져 있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신성한 판결에 너희가 관여할 수는 없지만, 이 세상에서 그들이 형제신분의 현세적 복지에 관계하도록 행동하는 문제는 네가 결정해도 될 것이다. 또한 그러한 형제신분의 제자훈련과 관련된 이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너희가 땅에서 판결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하늘에서 인지(認知)될 것이다. 비록 너희가 각 개인의 영원한 숙명을 결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 집단의 행위에 관하여 너희가 규율을 제정할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너희 중에 두 세 사람이 이 일들 중에 무엇이던지 의견이 일치되고 내게 구한 것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과 어긋나지 않는 한 너희가 요청한 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 모든 말은 항상 그대로 이루어질 것인데, 왜냐하면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내가 그들 중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159:1.4히포에서 사명활동하는 자들의 책임을 맡은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예수가 말씀하는 것을 듣고 질문했다; “주님, 내 형제가 내게 대하여 죄를 지을 때, 몇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예수가 베드로에게 대답하였다: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흔 일곱 번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왕국은 마치 그의 신하들에 대한 회계계산을 명한 어떤 임금과 같다. 그들이 장부(帳簿)를 조사하기 시작하자, 우두머리 신하들 중의 하나가 끌려나와 왕에게 일 만 달란트의 빚을 졌다고 고백하였다. 이 때 왕의 재판정에서 일하는 한 관리가 그 신하에게 어려움이 닥친 것과 이 빚을 갚을 힘이 없음에 대하여 변호해 주었다. 그러자 왕은 그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아이들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명하였다. 그 우두머리 신하가 이 엄중한 판결을 듣고, 왕 앞에 엎드려 자비를 베풀어서 시간을 더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여 말하기를, ‘주님이시여,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그리고 왕은 이 게으른 종과 그의 가족들을 보자, 연민이 들었다. 그는 그를 놓아주라고 명하였고, 빚을 모두 탕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159:1.5“그러나 왕으로부터 자비와 용서를 입은 이 우두머리 신하는, 자기 일에 몰두 하였는데, 자기아래에 있는 신하 가운데 일 백 데나리온 밖에 빚지지 아니한 하나를 찾아가, 그를 붙잡고 목을 조르며 ‘내게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이 동료신하는 그 우두머리 신하 앞에 엎드려, 간청하여 말했다; ‘제발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제가 곧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우두머리 신하는 그의 동료신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다른 동료 부하들이 되어 가는 일을 보고, 너무나 괴로워하다가 그들의 왕, 주님에게 나아가 고하였다. 왕이 우두머리 신하의 모든 소행을 듣고, 은혜를 모르고 용서를 베풀지 아니하는 이 사람을 불러서 말했다; ‘너는 악하고 무익한 신하이다. 네가 연민을 베풀기를 구하였을 때, 너를 용서하고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네게 자비를 베풀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네 동료신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였느냐?’ 왕은 매우 화가 나서 은혜를 모르는 우두머리 신하를 옥졸들에게 내어주어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께서도 동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들에게 더욱 풍성한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같은 인간의 이러한 결점으로 인하여 너희 형제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너희가 늘 응징을 하면서, 어떻게 하느님께 나아와 너희의 결점을 헤아려달라고 요청할 수가 있겠느냐? 너희 모두에게 말하겠는데: 너희가 왕국으로부터 그 선한 것들을 값없이 받았으니; 너희도 이 땅에서 네 동료들에게 값없이 주도록 하여라.”
159:1.6이렇게 하여 예수는 동료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가르치시고 그 부당함을 밝히 가르치셨다. 계속적인 훈계가 있어야만 하고, 공의가 시행되어야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있어서 형제신분의 지혜가 우선되어야 한다. 예수는 집단으로서의 합법적이고 비판적인 권위는 인정하였지만, 개변존재로서의 그것은 그렇지 않었다. 집단으로서의 이 권한부여 조차도 그것이 개인적 권한으로 사용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한 개별존재가 평결을 내리는 데에는 편견 또는 왜곡된 감정에 의해 비뚤어질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집단의 판결은 개인적 성향에서의 위험을 제거하고 불공정성을 없애는 데 더욱 적당하다. 예수는 항상 불공정성, 보복과 복수의 요소를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159:1.7[자비와 참을성의 본보기로 일흔 일곱 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라멕이 그의 아들 두발-가인의 금속무기 때문에 몸시 기뻐했음을 언급하는 성서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그 무기들이 적의 것보다 월등히 뛰어남을 비교하면서: “카인이 손에 아무 무기도 없이 일곱 배 원수를 갚았으면, 이제는 내가 일흔 일곱 배로 갚으리라.”외쳤었다.]
159:2.1예수는 사도 요한 그리고 그와 함께 일하는 제자들을 만나기 위하여 가말라로 올라 가셨다. 그 날 저녁,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는 형식의 모임이 있은 후에, 요한이 예수께 말했다; “주(主)여, 당신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게다가 귀신들까지도 쫓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을 만나려고 제가 어제 아스타롯에 올라갔었습니다. 이 친구는 저희와 같이 한 적이 결코 없었고, 저희들을 따르지도 않기에 그러한 것들을 하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가 말씀하였다. “그를 금하지 말라. 왕국 복음이 곧 모든 나라들에서 선포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너희가 어떻게 복음을 믿게 되는 자들 모두가 너희의 지시에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 우리의 가르침이 이미 우리의 직접적인 영향의 한계를 벗어나서 스스로 나타나고 있음을 기뻐하라. 요한아, 내 이름으로 큰일을 한다는 자들도 결국에는 우리가 주장하는 바를 돕게 되리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하겠느냐? 그들이 나에 대하여 악한 말을 재빠르게 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나의 아들아, 이런 종류의 문제라면, 우리를 배척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한 자라는 사실을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오는 세대에는, 온전하게 자격이 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신기한 일들을 많이 행하겠으나, 나는 그들을 금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냉수 한 잔을 목마른 자에게 주었을 때라도, 아버지의 사자들이 그러한 사랑의 봉사에 대하여 영원히 기록할 것이라는 것이다.”
159:2.2이 설명은 요한을 매우 당황하게 하였다. 주(主)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배척하는 자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었던가? 그러나 그 경우에는 예수가 왕국의 영적 가르침들에 대한 사람들의 개인적 관계에 대하여 말씀한 것이며, 반면에 이번의 경우에는 결국에는 다가오는 세계적 형제신분을 이룩할 다른 집단들의 일을 관할하려는, 한 신자들의 집단으로서의 행정적 통제와 사법권 문제들에 관한, 신자들의 바깥쪽으로 그리고 멀리 퍼지는 사회적 관계를 말씀한 것이라는 사실을 요한은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159:2.3그러나 요한은 그의 여생에 왕국을 위해 애 쓰면서 이 체험을 종종 되새기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주(主)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여러 번 불쾌한 태도를 취하였다. 예수의 발 아래에 앉아 보지도 못한 자가 감히 그의 이름으로 가르친다는 것을 사도들은 언제나 온당치 못한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159:2.4예수의 이름으로 행하고 가르치는 것을 요한이 금지시킨 이 사람은 사도들의 명령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옳은 방향으로 노력을 하였고 메소포타미아로 가기 전에 카나타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믿게 하였다. 이 사람의 이름은 아덴이었는데, 예수가 게레사 근처에서 병을 고쳐 주었던 미친 사람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주(主)께서 그로부터 쫓아내신 악한 영들이 돼지 떼 속에 들어가 벼랑으로 달려가게 하여 죽게 하였다는 것을 매우 확고하게 믿었다.
159:3.1도마와 그의 일행들이 사명활동하던 에드레이에서, 예수는 하루 낮과 밤을 보내셨으며, 저녁에 가진 토론에서 진리를 설교하는 자들에게 지표가 되고 왕국 복음을 가르치는 모든 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원칙들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요약하여 다시 기술한다면,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159:3.2사람의 개인성을 항상 존중하라. 정의로운 이유는 결코 기세로서 권장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승리는 오직 영적 힘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 물질적인 영향을 이용하지 말라는 이 명령은 정신적 기세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기세에도 관련된 것이다. 남자나 여자들을 강제로 왕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압도하는 논리와 정신적인 우월성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마음은 단순히 논리의 무게로 압도하거나 날카로운 웅변으로 위압하여서는 안 된다. 인간 의사 결정을 내리는 한 요소로서 감정을 전부 무시할 수는 없지만, 왕국 운동을 진전시키려 하는 자들을 가르칠 때, 감정에 직접 호소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주하는 신성한 영에게 직접 호소하도록 하라. 두려움이나 연민 또는 단순한 감상에 호소하지 말라. 사람들에게 호소할 때에 공정하도록 하라; 자제력(自制力)을 발휘하고 마땅한 절제력을 보이며; 너희 제자들의 개인성을 진실로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라. 내가 하는 말을 기억하라: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고 있으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안으로 들어가겠다.”
159:3.3사람들을 왕국으로 인도할 때에 그들의 자아-존중을 상하게 하거나 꺾지 말라. 지나친 자아-존중은 적절한 겸손을 파괴할 수도 있으며, 끝에 가서는 오만, 자만, 그리고 거만에 이르게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자아-존중을 잃는 것은 때때로 의지를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아-존중을 잃었던 자들에게는 그것을 회복시키고, 자아-존중이 있는 자들에게는 그것을 삼가 하도록 하는 데에 이 복음의 목적이 있다. 너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 속에서 오직 잘못만을 꾸짖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 그들의 삶 속에서 가장 칭찬할 만한 것들을 너그럽게 인지하여 칭찬하는 것도 잊지 말라. 자아-존중을 잃었던 자들과 정말로 그것을 다시 찾고자 하는 자들에게 자아-존중을 회복시켜주는 일을 내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
159:3.4내성적이고 두려움이 많은 자들의 자아-존중을 손상치 않도록 조심하라. 단순한 마음을 소유한 나의 형제들을 희생시키면서 빈정거리는 일에 탐닉하지 말도록 하라. 두려움에 떠는 나의 자녀들에게 냉소적인 태도를 갖지 말라. 놀고먹는 일은 자아-존중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너희 형제들이 선택한 임무에 계속 정진하도록 그들을 권고하며, 직업이 없는 자들에게 일자리를 보장하는 일에 모든 노력을 다하라.
159:3.5사람들을 위협하여 왕국에 들어가도록 하는 무익한 술책의 잘못을 결단코 저지르지 말라. 사랑을 가진 아버지는 자녀에게 겁을 주어서 오직 자기가 원하는 요구에 온순하게 복종할 수 있도록 만들지 않는다.
159:3.6왕국의 자녀들은 감정상의 강한 느낌이 신성한 영의 인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을 하거나 또는 특정한 장소에 가고자 하는, 강렬하면서도 이상야릇하게 받는 감동이, 내주 하는 영의 인도에 수반되는 충동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59:3.7육신으로 살았던 일생으로부터 영적으로 사는 보다 높은 일생으로 옮아 간 모든 사람들이 건너야만 하는 부차적인 갈등에 관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미리 경고한다. 어느 쪽 세계든지 매우 온전하게 살았던 자에게는 갈등이나 혼돈이 거의 없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차원의 삶으로 옮겨가는 기간 동안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불확실성을 체험하게 되어 있다.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너희들로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의무를 피하도록 할 수는 없으나, 복음의 멍에는 쉽고 진리의 짐은 가볍다는 것을 기억하라.
159:3.8세상에는 생명의 빵을 바로 앞에 놓고도 굶주려 배고픈 혼들로 가득하다; 자기 안에 살아 계신 그 하느님을 찾다가 죽어 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신앙의 즉시 잡아 챙길 수 있는 거리에, 모든 것이 있는데도 간절한 가슴과 피곤에 지친 발로 왕국의 보물을 찾아다닌다. 신앙이 종교와 가지는 관계는 돛이 배와 가지는 관계와 같다; 그것은 힘의 증가이지, 결코 일생의 짐이 증가되는 것이 아니다. 왕국에 들어가는 자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투쟁이 있는데, 그것은 신앙의 선한 싸움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다. 믿는 자에게 오직 한가지의 전투가 있으니, 그것은 의심 ─ 믿지 않음 ─ 을 상대하는 것이다.
159:3.9너희는 왕국의 복음을 설교함에 있어서, 단순하게 하느님과의 화목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 동료관계는 남녀 모두에게, 어떤 것이 그들의 특징적 열망과 이상을 가장 진실로 만족시키는지를 모두가 찾게 됨으로서, 똑같이 호소될 것이다. 나의 자녀들에게 이야기할 때, 내가 그들의 감정을 아끼고 그들의 과실(過失)을 오래 참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가 죄에 대해 냉혹하고 불법을 참지 못한다는 것도 말해 주어라. 내 아버지 앞에서는 내가 정말로 유순하고 겸손하지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에 반대하는, 죄로 가득 찬 반역과 고의적인 악행이 있는 곳에서는 내가 마찬가지로 가혹하도록 냉혹하다.
159:3.10너희는 너희 선생을 묘사할 때, 슬픔에 가득 찬 한 남자로 그리지 마라. 장차 올 세대들은 우리의 기쁨으로 인한 광채, 우리의 선한 의지로 인한 낙천적 기질, 그리고 우리의 선한 재치로 인한 영감도 또한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변환시키는 그 힘으로 전달되는 좋은 소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우리의 종교는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의미들로 약동하고 있다. 이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며, 가슴 속에는 반드시 기쁨이 항상 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확신하는 자는 누구나 더욱 넘치는 행복을 체험할 것이다.
159:3.11모든 믿는 자들이 잘못된 동정심에 의한 불안정한 기둥에 기대지 않도록 가르쳐라. 너희가 자아-연민에 탐닉할 때에는 강한 성격을 개발할 수 없으며; 고통 속에서 갖는 단순한 동료관계로 현혹시키는 영향을 피하기 위하여 정직하게 노력하라. 삶의 시련 앞에 건성으로 단순히 서 있는 소심한 혼을 가진 저들에 대한 과도한 연민을 자제하고, 용감하고 담력이 있는 자들에게 동정심을 펼쳐라. 재난이 닥쳐왔는데도 투쟁하기보다는 그저 안일하게 누워있는 자들에게는 위로를 제공하지 말라. 너희 동료들이 너에게 동정을 베풀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들에게 동정을 베풀려 하지 말라.
159:3.12내 자녀들이 신성한 현존을 확신하는 자아-의식에 일단 도달하면, 그러한 신앙은 마음을 확대시키고, 혼을 고귀하게 하며, 개인성을 강화시키고, 행복을 증대시키며, 영 인식을 더욱 깊게 하고, 사랑하는 힘과 사랑 받는 힘을 강화시켜 준다.
159:3.13왕국에 들어가는 자들은 그로서 시간의 우연한 사고나 자연적인 일반 재앙에서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자들에게 가르쳐라. 복음을 믿는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막아주지는 않겠지만, 재난이 너를 덮칠 때에 너희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임을 보증할 것이다. 만일 너희가 용기를 가지고 나를 믿고자 하며 전심으로 내 뒤를 따르고자 한다면, 너희는 그렇게 함으로써 굳게 믿는 고난의 길로 아주 확신을 가지고 들어설 것이다. 나는 역경의 강물로부터 너희를 건져 주겠다는 약속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 너희와 함께 갈 것을 약속한다.
159:3.14믿는 이 무리들이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기까지 예수는 더욱 많은 것들을 가르치셨다. 이 말씀들을 들었던 자들은 그것들을 가슴 속에 소중히 간직하였으며, 그 자리에 없었던 사도들과 제자들을 선도하기 위하여 종종 다시 이야기하곤 하였다.
159:4.1그 다음에는 예수가 나다니엘과 그의 일행들이 수고하고 있는 아빌라로 가셨다. 나다니엘은 인정된 히브리 경전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듯이 보이는 예수의 어떤 발언들로 인하여 많이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날 밤에, 질문과 대답으로 일관된 통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 나다니엘은 예수를 아무도 없는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가서 물었다: “주(主)여, 제가 성서를 진리로 알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으십니까? 저는 당신께서 거룩한 기록들 중에서 일부분 ─ 제가 보기에도 가장 훌륭한 부분 ─ 만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을 보아 왔으며, 율법의 말씀들이, 아브라함과 모세의 시대 이전에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함께 있어 온, 바로 그 하느님 말씀이라는 취지로, 랍비들의 가르침을 거부한다고 추측합니다. 성서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당황하고 있는 사도의 질문을 들으신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159:4.2“나다니엘아, 네가 옳게 판단하였다. 나는 랍비들이 하는 것처럼 성서를 대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 이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온전히 갖추어 지지 않은 네 형제들에게 네가 이것들을 관련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 문제에 대해 너에게 이야기하려고 한다. 모세의 율법의 말씀들과 성서의 가르침들은 아브라함 이전에는 없었다. 다만 최근에 성서가 모아져서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것처럼 되었다. 그 글들이 유대인들의 높은 사고와 열망들 중에 가장 훌륭한 것들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반면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격이나 가르침을 대변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아주 먼 것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왕국 복음을 위하여 주워 모은, 보다 나은 진리의 가르침들 중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159:4.3“이 가르침들은 사람들이 만든 것인데, 그들 중에 일부는 거룩한 사람들이었고, 또 어떤 자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 책들의 가르침들은 그들이 기원된 그 시대의 계몽에 대한 전망과 범위를 나타낸다. 진리를 계시한다는 점에서, 전반부보다는 후반부가 더 신뢰할 만하다. 성서가 불완전하고 인간으로부터 기원된 것이기는 하지만, 오류를 범하지 말라, 그것은 오늘날 모든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종교적 지혜와 영적 진리 중에서 최고의 수집을 이루어놓았다.
159:4.4이 책의 많은 부분은 그 책이 지닌 이름의 사람에 의해 씌어진 것이 아니지만, 그 사실 때문에 담겨져 있는 진리의 가치가 떨어질 수는 없다. 만일에 요나에 관한 기사가 사실이 아니었다 해도, 심지어는 요나라는 사람이 전혀 있지 않았다 해도, 이 이야기에는 여전히 깊은 진리가 있으며, 소위 이방이라고 불리는 니느웨에 대한 하느님의 그 사랑은, 동료를 사랑하는 자들의 눈에는 조금도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성서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신성하며, 그들은 이 글 속에 정의(正義), 진리 그리고 거룩함에 대한 그들의 가장 높은 개념들을 기록해 놓았다. 성서는 진실을 매우 많이 포함하고 있지만, 오늘날 너희가 가르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본다면, 하늘에 계신 하느님, 내가 와서 모든 세계에 나타내고자 하는 사랑의 하느님에 대하여 그릇되게 설명하는 많은 부분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희가 알 것이다.
159:4.5“나다니엘아, 사랑의 하느님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그들의 적을 모두─남녀노소를 막론하고─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도록 하였다는 성서의 기록을 한 순간도 결코 믿으려 하지 말라. 그러한 기록들은 사람들의 말이며, 매우 거룩한 사람들의 말도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도 아니다. 성서는 그것을 지어낸 사람들의 지적, 도덕적, 영적 지위를 늘 반영해 왔으며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선지자들이 사무엘로부터 이사야에 이르는 그들의 기록을 만들어 가면서 야훼 하느님에 대한 개념이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변화 발전해 간 것을 네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성서가 종교적인 가르침과 영적 안내를 위한 것임을 너는 꼭 기억하라. 성서는 역사가나 철학자들의 작품이 아니다.
159:4.6“성서 기록이 절대로 완전하다는 것과 그리고 그 가르침이 틀림없다는 잘못된 관념이 가장 통탄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에 사로잡혀 있는 예루살렘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이 성스러운 글들이 잘못 해석되어 혼란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제 저들은, 왕국 복음의 더욱 새로운 가르침에 저들이 저항하기를 굳게 결정하면서, 성서가 영감 받았다는 교리 그리고 그 해석상의 오류의 그 두 가지를 모두 활용하고 있다. 나다니엘아, 아버지는 진리에 대한 계시를 어느 한 세대 또는 어느 한 민족에게만 제한시키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 하거라.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해 왔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할 많은 사람들이 성서가 완전하다는 이 교리들 때문에 혼동되고 낙심될 것이다.
159:4.7“진리에서의 권위는 그 살아있는 명시 속에 깃들어 있는 바로 그 영이고, 어떤 다른 세대의 다소 희미하면서도 영감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옛 사람 중에 성스러운 사람들이 설혹 영감을 받고 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들의 말도 똑같이 영적으로 영감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왕국 복음에 대한 가르침을 기록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내가 떠난 후에 내 가르침에 대한 너희들의 다양한 해석의 결과로 인하여 가지각색의 진리 논쟁자 분파로 속히 나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세대에 있어서는 기록을 만드는 것을 피하고 이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159:4.8“나다니엘아, 내 말을 잘 기억하라. 인간 본성이 닿은 것에는 틀림없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신성한 진리가 참으로 빛을 발하게 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상대적으로 순수할 뿐이며 부분적인 신성이 있을 뿐이다. 창조체는 틀림없는 것을 갈망하지만, 오직 창조주들만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
159:4.9“그러나 성서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실수는 오직 그 민족의 현명한 마음을 가진 자들만이 감히 해석할 수 있는 지혜와 신비의 책이라고 봉해 버리는 교리에 있다. 신성한 진리에 대한 계시는 인간의 무지, 완고함, 그리고 편협 되고 옹졸한 마음에 의해서만 봉해지는 것이다. 성서가 발하는 빛은 오직 선입관에 의해서 약해지며 미신적 습관에 의해 어두워진다. 신성함에 대한 잘못된 두려움이 종교가 상식적인 보호수단이 되는 것을 방해하여 왔다. 과거에 쓴 신성한 글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이, 오늘날 정직한 혼들이 복음의 새로운 빛, 하느님을-아는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 빛을,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159:4.10“그러나 무엇 보다 가장 슬픈 점은 이 전통주의의 존엄함을 가르치는 선생들의 일부가 바로 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성서의 한계성을 거의 완전히 납득하고 있으면서도, 도덕적으로는 비겁하며, 지적으로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들은 거룩한 글들에 관하여 진상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흔들리는 있다는 사실을 막아야 한다는 것에 더욱 즐겨 빠져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룩한 글들을, 다른 세대의 하느님을-아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지혜와 종교적 영감 그리고 영적 가르침의 저장고로서 간청하는 대신, 성서를 왜곡하고 일상생활의 노예로 만드는 세부사항과, 영적이 아닌 일들의 권위에 대한 안내서로 만들면서 그릇된 길로 빗나게 한다.”
159:4.11나다니엘은 주(主)의 분명한 말씀에 교화되었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 대화를 깊은 상념에 잠겨서 심사숙고하였지만, 예수가 상승한 이후까지 이 대화 내용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주(主)가 설명한 모든 이야기를 전하기에 두려워하였다.
159:5.1야고보가 사명활동하는 필라델피아에서, 예수는 왕국 복음의 적극적 본성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설명하였다. 주(主)는 성서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들 보다 더 많은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가장 좋은 영적 음식으로 자기 혼을 먹이라고 청중들에게 훈계하였는데, 말씀하는 도중에, 야고보가 끼어들어 물었다: “주(主)여, 우리의 개인적 향상에 보다 적당한 구절들을 성서에서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가 대답하였다. “좋다. 야고보야, 네가 성서를 읽을 때에 영원히 참되고 신성하게 아름다운 다음과 같은 가르침들을 찾아보라:
159:5.2“오 주님. 내 속에 정결한 가슴을 창조하소서.
159:5.3“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59:5.4“네 자신을 사랑함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159:5.5“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네 오른 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159:5.6“나라들이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159:5.7이것은 예수가 따르는 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또는 새로운 왕국 복음을 가르치실 때 삽입하기 위하여, 날마다 히브리 경전의 진수를 인용한 예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하느님을 사람과 비슷한 존재로 생각하도록 암시하지만, 예수는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보살핌을, 독립하지 못한 자기 자녀의 행복을 위하여 사랑하는 아버지가 염려하는 것에 비유하였으며, 이 가르침을 그의 종교에 주춧돌로 삼았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아버지신분 교리는 반드시 사람의 형제신분 실행을 피할 수없게 만든다. 하느님께 경배 드리는 것과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이 그의 종교의 전부이며 실질적인 내용이다. 예수는 유대교에서 가장 좋은 부분을 취하셔서 왕국 복음의 새로운 가르침 안에 옮겨놓았다.
159:5.8예수는 적극적인 행동의 정신을 유대교의 수동적인 교리 속에 적용시키셨다. 예수는, 의식을 지키는 요구를 따르는 부정적인 순종 대신에, 그의 새 종교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을 명하였다. 예수의 종교는 단지 믿는 것에 있지 않고, 복음이 요구하는 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에 있다. 예수는 그의 종교의 근본이 사회에 대한 봉사에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었고, 오히려 사회봉사는 참된 종교정신을 소유함을 나타내는 확실한 효과중의 하나라고 가르쳤다.
159:5.9예수는 성서의 좋은 반쪽을 이용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고, 반면에 보다 뒤 떨어진 부분들은 사용하기를 거부하였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위대한 교훈은 “너희는 네 민족의 자녀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성서의 기록으로부터 예수가 취한 것이다. 예수는 이 성서 중에서 긍정적인 부분은 수용하였지만, 부정적인 부분은 거부하였다. 예수는 부정적이거나 순전히 소극적인 무저항을 마찬가지로 더욱 반대하였다. 예수가 말씀하기를 “원수가 네 한 쪽 뺨을 칠 때 소극적으로 멍하니 서 있지만 말고 적극적인 태도로 다른 뺨을 돌려 대라; 다시 말해서, 실수를 저지르는 네 형제를 악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선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라.” 예수는 따르는 자들에게 일생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반응할 것을 요구하였다. 다른 뺨을 돌려 대든지 또는 그것을 상징할만한 어떤 행동이든지, 솔선하는 것이 요청되며, 믿는 자임을 나타내는 활기차고, 적극적이고 그리고 용기 있는 개인성 표현이 요구된다.
159:5.10예수는 악(惡)에 대하여 무저항적인 사람을 이용하려고 일부러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주는 모욕에 소극적으로 굴복할 것을 권유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선(善)으로 악을 효과적으로 이기게 될 때까지, 악에 대하여 신속하고 적극적인 반응을 하되, 현명하고 기민하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가장 고약한 악보다 진실된 선이 반드시 더 강력하다는 것을 꼭 기억하라. 주(主)는 의(義)에 대한 적극적인 기준을 가르치셨는데: “내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기 위해 매일 주어지는 의무를 온전히 감당하라.” 그리고 주(主) 자신이, “그는 부지런히 선한 일을 행하였다.”는 말 그대로 사셨다. 복음의 이 측면은, 따르는 무리들에게 후에 말씀한 많은 비유들에 의하여 잘 표현되었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인내심으로 의무를 이행하라고 훈계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하느님의 왕국 안에서 그들의 인간 책임과 신성한 특권을 충분히 채우기까지 힘과 열정을 가지고 살라고 가르치셨다.
159:5.11예수가 사도들에게, 어떤 사람이 겉옷을 부당하게 벗겨 가거든 다른 옷도 벗어주라고 가르치셨을 때, 글자 그대로 두 번째 겉옷을 의미하였기 보다는 오히려, 보복하라고 충고하는 옛 가르침 ─ “눈에는 눈으로” 등등 ─ 대신에 가해자를 구원할 수 있는 어떤 적극적인 일을 하라는 관념으로서 설명한 것이었다. 예수는 보복하려는 생각을 싫어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극적인 태도로 고난을 참아내는 자 또는 불법에 대하여 희생자가 되는 관념을 아주 싫어 하였다. 이 경우에 있어서 예수는 악에 맞서서 저항하고 싸우는 세 가지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치셨는데:
1. 악을 악으로 갚음 ─ 적극적이지만 불의(不義)한 방법.
2. 불평이나 저항 없이 악을 견딤 ─ 순전히 소극적인 방법.
3. 악을 선으로 갚음, 그 상황의 주인이 되도록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고, 선으로 악을 정복함 ─ 적극적이며 의로운 방법.
159:5.12사도들 중에 하나가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주(主)여, 만일 어떤 낯선 사람이 자기 짐을 1마일이나 지고 가도록 제게 강요한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수가 대답하였다. “한편으로는 속으로 그 낯선 사람에게 심한 욕을 하면서, 벗어나려고 앉아서 한숨을 쉬지 말라. 그러한 소극적인 태도로는 의를 이룰 수 없다. 더 적극적이고 효과 있게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나지 없거든, 적어도 네가 그 짐을 지고 다음 일 마일을 더 가 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면 불의하고 사악한 그 낯선 자에게 확실한 도전이 될 것이다.”
159:5.13유대인들이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고 그들의 잘못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하느님에 대하여는 많이 알고 있었으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시고, 죄인들을 찾는데 솔선하며, 그들을 찾았을 때 기뻐하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시는 하느님에 대하여는, 사람들은 예수가 오시기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예수는 종교에 있어서의 이 적극적인 내용의 말씀을 그의 기도에도 적용하였다. 그리고 소극적인 황금률을 인간 공정성에 대한 적극적 훈계로 바꾸셨다.
159:5.14예수는 가르치실 때에 세부사항들을 이야기하여 산만하게 되는 것을 항상 의도적으로 피하였다. 예수는 화려한 문체의 말을 멀리하였으며 단순히 시적인 표현으로 말장난 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예수는 설명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소금, 누룩, 고기잡이, 어린 아이 등과 같은 많은 단어들의 현재 통용되는 의미를 바꾸어 사용하였다. 순간을 영원과 대비시킨 것 외에도 많은 경우에 대조법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의 묘사 방법은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예를 들어 가르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자연스러움에 있었다. 예수는 종교의 철학을 하늘로부터 땅으로 가져 왔던 것이다. 그는 새로운 통찰력과 새로운 애정의 증여와 함께, 기본적 요소가 되는 혼이 필요하다는 것을 묘사하였다.
159:6.1데카폴리스에서의 네 주간 동안의 전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왕국에 받아들여졌고,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예수가 바로 옆에 함께 하면서 주는 영감 없이도, 그들의 일을 감당하였다는 점에서 값진 체험을 하였다.
159:6.29월 16일, 금요일에, 모든 사명활동자들은 미리 지시되었던 대로 마가단 공원에 모두 모였다. 안식일이 되자, 왕국의 일을 확장하려는 앞으로의 계획이 한껏 논의되었던 백이 넘는 신자들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다윗의 연락원들이 와서,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갈릴리 그리고 인접한 지역들에 퍼져 있는 믿는 자들이 잘 있는가에 대하여 보고를 하였다.
159:6.3이 때 예수를 따르는 자들 대부분은 그 연락부대의 굉장한 가치를 잘 알지 못하였다. 그 연락원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의 신자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예수 그리고 사도들과 연락이 유지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암울한 기간 동안 자금을 모으는 역할도 담당하였는데, 이 돈은 예수와 그의 동료들의 양식을 위하여서도 씌어졌지만, 더 나아가서는 열 두 사도들과 열 두 전도자들의 가족들을 돕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159:6.4이 무렵에 아브너는 그의 활동 근거지를 헤브론에서 베들레헴으로 옮겼으며, 새로 옮긴 장소는 다윗의 연락원들의 본부이기도 하였다. 다윗은 예루살렘과 벳세다 사이에 밤을 새워 교대식으로 연락하는 사람을 두었다. 이들은 매일 저녁에 예루살렘을 떠나 달려갔으며, 시카와 스키토폴리스에서 교대하고, 다음날 아침 식사 시간에 벳세다에 도착하곤 하였다.
159:6.5예수와 그의 일행들은 이제 왕국을 위한 사명활동의 마지막 신(新)시대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 전에, 일주일 동안 휴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마지막 휴식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페레아 사명이 설교 그리고 전도 운동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고, 그리고는 이것은 곧바로 그들의 예루살렘 도착 때까지 이어졌으며 그리고는 예수가 이 땅에서의 삶의 막을 내리는 에피소드를 연출하는 때까지 바로 이어졌다.